곡성 - 나홍진이 그리는 세번째 지옥도


나홍진 감독의 세 장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추격자>는 좋았고 <황해>는 정말 좋았습니다. 2014년 제목이 공개됐을 때부터 기다려왔던 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은 몹시 나홍진답고 나홍진이 한국 영화계에서 얼마나 독특한 캐릭터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이전 두 편의 장편인 <추격자>와 <황해>를 관통하는 관객들의 공통점 경험은 압도감이었습니다. 그 압도감은 어떠한 스케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로 쉴 틈 없는 폭력과 리듬감 넘치는 컷 구성, 그리고 어떠한 희망도 기약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운명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특히 세번째 요소 때문에 나홍진의 영화들을 좋아합니다. <추격자>의 그 유명한 슈퍼마켓 씬, <황해>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 없이 끊임없이 쫓겨 다니는 구남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추격자>와 <황해>는 공권력도, 사회도, 그 어떠한 '인간적' 가치도 가차 없이 비웃습니다. 감독이 '로맨스 영화'라고 밝힌 (...) <황해>에서 구남의 구원은 연인과의 재회에 있지만 결국 이는 황해 바다 깊은 곳에 쳐박히며 영원히 도래하지 않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의 특성은 이러한 '구원 없음'의 공간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전방위적인 포위와도 같습니다. 모두가 달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고, 또 달리지만 그 어떤 행동도 닥쳐올 운명을 막아설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추격자>와 <황해>의 공간은 지옥입니다. 지옥은 이미 내려진 최종심결의 결과물으므로 그 안에서 회개의 가능성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듯이 지옥은 신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따라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야 하는 구원은 그 안에서 절대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구원 가능성이 차단된 세계에서 인간의 믿음과 회의, 선택과 응답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이 상실은 고전적 의미에서나 현대적 의미에서나, 인간을 주체의 자리에서 몰아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추격자>와 <황해>의 인물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차라리 <황해>의 개뼈다구나 <추격자>의 망치에 더 가까운 사물일 뿐입니다. (심지어 원안에서는 망치가 아니라 사람 머리였다면서요? 대단...)

<곡성> 역시 비슷한 테마의 연장선상에 서 있습니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이 영화는 모든 구원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닥쳐올 수밖에 없는 고통과 공포 앞에 서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개선의 여지 없는 공포의 무기력함은 코즈믹 호러 작품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인 <인스머스의 그림자>가 연상되었는데, 외진 마을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들과,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는 절대악적 타자인 일본인, 뒤틀려버리는 주민들, 그리고 일본인이 차려놓은 심히 오컬트스러운 단상 등이 러브크래프트적인 향취를 느끼게 했습니다. 2부에 해당하는 부분에 들어서도 하얀색 무쏘를 타고 메시아처럼 등장하는 무당 일광에 의한 구원은 그러나 아버지 종구의 회의와 부성애(?)에 의해 좌절됩니다. 여기까지는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처럼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잔인한 조소로 받아들여집니다. 독버섯에 의한 단순 해프닝 정도로 일축되는 뉴스 보도도 (어떤 분들은 이것이 진실이라 생각하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사건에 어떠한 외부의 개입도 좌절될 것이라는 점에서 지옥도를 그려내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고 봅니다. 지옥은 지금 여기서 경험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곡성>의 후반부에서는, 이런 말을 쉽게 믿기 힘들겠지만, 나홍진의 이전 작들에 비해 인간에 대한 시선이 꽤나 따뜻해졌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트럭에 치여 죽은 일본인의 시체를 던져버린 뒤로 시작하는 <곡성>의 결말부는 놀랍게도 믿음과 회의, 그리고 선택의 문제를 끌어옵니다. 사건의 진상에 대해 일광과 무명이 전해주는 상반되는 주장 사이에서 종구는 양자택일의 확연한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무명의 주장은 인과관계가 석연찮지만 '세 번 우는 닭'이라는 기독교적 테마를 통해 믿음의 화두를, 일광은 인과관계와 경험적 증언을 통해 회의의 화두를 던집니다. 동시에 진행되는 동굴에서의 사이드스토리에서 일본인은 악마의 모습과 그리스도의 흔적을 동시에 현시하며 부제에게 믿음의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종구는 머리핀과 야상, 그리고 가디건이라는 '증거'를 통해 인간적 '추리'를 진행하며 이는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역시 식구들과 함께 찔려 죽어가며 '지켜주겠다'는 공허한 말을 흘립니다. 이는 이 영화가 여전히 인간적 선택에 대한 회의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곡성>이 <추격자>나 <황해>에 비해 크게 다른 점은, 다시 인간을 사물이 아닌 주체의 자리로 돌려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딸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느냐는 종구의 물음에 일광은 '미끼'에 대해 말합니다. 낚시꾼은 무엇이 물지를 알고 미끼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유 없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현혹되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현혹은 선택 가능성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종구의 회의는 옳았을까요? 부제의 믿음은 틀렸을까요? 지옥도처럼 펼쳐진 곡성의 모습은 그래도 여전히 지옥은 아닌 것일지도 모릅니다.


by Zannah | 2016/05/13 18:08 | 끄적인 감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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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녹은빙수 at 2016/05/19 20:57
그렇다면 천우희 역은 어떤 존재일까요? 극중 묘사로는 종구와 파트너 경찰만 천우희를 본 것처럼 묘사되던데 이것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at 2016/05/25 23:14
해석 잘봤습니다.

지금까지 봤던 해석중에 가장 깔끔한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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